'더비'
같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클럽 간의 대결 또는 정치적, 종교적 등 역사적으로 대립각을 세워온 두 클럽 간의 대결을 뜻한다.
유럽 축구에는 수 많은 더비가 존재하지만,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맞붙는 '엘클라시코'는 전 세계 축구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이벤트 가운데 하나다.
정치적인 대립에서 시작된 '엘클라시코'의 역사, 별들의 전쟁은 언제 왜 탄생했을까?
1902년 5월 13일, 첫 '엘클라시코'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간의 역사적인 첫번째 경기는 1902년 5월 13일 현 코파델레이(Copa del rey: 국왕컵)의 전신인 코파데라코로나시온(Copa de la coronacion)에서 처음 펼쳐졌다.
당시 경기는 창단 3년차인 FC 바르셀로나가 갓 탄생한 신생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3-1로 승리를 거뒀다.
1928년, 정치적 앙금에서 탄생한 '라이벌리'
사실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사이에는 더비가 탄생할 이유가 없었다. 대다수의 더비는 같은 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두 팀 사이에서 펼쳐지는 경기를 뜻하며, 이런 의미에서 FC바르셀로나의 연고지 더비는 RCD에스파뇰,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의 경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맞다.
그러나 두 팀의 악화된 관계는 축구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탄생했다. 여기에는 스페인의 두 독재자가 큰 영향을 미쳤다.
1928년 리그에서 처음 맞붙은 두 팀은 1승 1패로 무승부를 거뒀다. 이전까지만 해도 두 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이 두 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당시 스페인을 집권하던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Primo de Rivera)는 카탈루냐의 지역 언어인 카탈란의 사용을 금지시키는 등 문화적 탄압을 이어갔다.
그런 리베라의 입장에서 FC바르셀로나의 아버지이자, 카탈루냐의 이념을 이해하고 이를 전파한 당시 구단주 주안 감페르(Joan Gamper)는 눈엣가시나 다름 없었다.
그러던 중 1925년 6월 24일, 리베라가 경기장을 방문한 날, FC바르셀로나의 팬들은 스페인 국가에 야유를 보내고 초청된 영국 왕실 해군 군악대의 'God saves the Queen' 연주에는 박수갈채를 보내며 독재에 대항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리베라는 이를 기회로 이용해 관중들의 모든 책임을 감페르에게 전가했고, 결국 감페르는 회장직에서 사임하게 됐다.
1943년, '차마르틴 스캔들'
악화된 두 팀의 관계는 1943년 최악으로 나아갔다.
1943년 6월 13일, 국왕컵 준결승에서 다시 맞붙은 FC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 1차전에서 FC바르셀로나가 3-1 승리를 거두며 승기를 잡았고, 카탈루냐 지역 언론은 환호했다.
이어진 2차전, 큰 이변이 없다면 FC바르셀로나가 결승으로 나아갈 것이 확실시 되었지만, 경기는 마드리드의 11-1 승리로 끝났다.
11-1은 역대 엘클라시코 전적 가운데 가장 큰 점수차, 그러나 이는 공식 기록으로 남지 못했다. 그 이유 역시 독재 정권의 개입이었다. 당시 스페인을 통치하던 프랑코는 본인의 직위가 걸린 (당시 프랑코는 스페인의 독재자였다) 대회에서 눈엣가시나 다름 없던 FC 바르셀로나가 우승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판단에 경기 시작 전 라커룸으로 자신의 수족을 보냈다.
라커룸을 방문한 프랑코 정권의 수하인 호세 모스카르도 장군은 바르셀로나 선수들에게 "더 이상 선을 넘지 않기를 충고한다"며 협박했다.
협박을 들은 FC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정상적으로 경기에 임할 수 없었고 결국 경기는 11-1 레알 마드리드의 승리로 끝났다.
경기 이후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렸으며, 이날 이후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장외에서도 치열한 엘클라시코
두 팀의 경쟁은 경기장 밖에서도 펼쳐졌다.
이적시장에서 두 팀은 최고의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치열한 대결을 펼쳤고, 영입 전쟁의 승자는 한 시대를 지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작은 1953년 디 스테파노의 영입이었다.
당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던 디스테파노를 영입하기 위해 스페인의 두 거함은 치밀한 작업을 이어갔다. 당시 리버플레이트 소속이었던 디 스테파노는 빈약한 남미 구단의 재정을 이기지 못하고 스페인으로의 이적을 모색했다.
이에 먼저 접근한 팀은 FC바르셀로나였다. 당시 FC바르셀로나는 리버플레이트와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며 디스테파노의 소유권을 가져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디스테파노는 바르셀로나와의 계약에 앞서 리버플레이트를 탈퇴하고 로스미요나리오스 소속으로 출전하고 있었다.
다만 리버플레이트가 디스테파노의 소유권을 완전히 이전시킨 것이 아니었기에 소유권은 두 구단 모두에 있었다. 이에 FC바르셀로나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도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지만, 이적료 부분에서 이견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접근해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협상을 체결한 것이다.
상황은 점점 복잡해져갔다.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는 물론 스페인과 콜롬비아 축구협회 여기에 FIFA까지 얽히며 디스테파노의 거취는 불분명해져갔다.
여기에 바르셀로나 팬들은 디스테파노가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만족할만한 활약을 펼치지 못하자, 스페인 정부가 디스테파노를 마드리드로 데려가기 위해 계략을 썼다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FC바르셀로나는 적절한 비용을 받고 디스테파노의 소유권을 레알 마드리드로 넘기며 상황은 일단락 됐다. (디 스테파노의 이적 사가는 추후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유니폼을 갈아입은 디스테파노는 맹활약을 펼쳤고, 당시 리그 3연패를 달리던 바르셀로나를 무너뜨리고 우승컵을 다시 마드리드로 가져오는데 일조했으며,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 5연패를 달성하며 마드리드의 전성기를 일궜다.
디스테파노를 놓친 바르셀로나는 라이벌에 점차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1974년 복수의 칼을 갈던 FC바르셀로나 역시 한 선수의 영입으로 라이벌을 앞질렀다.
아약스에서 뛰던 크루이프를 영입한 FC 바르셀로나는 1974년 2월 17일 프랑코가 지켜보는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5-0 승리를 거뒀다. (크루이프는 이적 당시 독재자가 뛰는 클럽에서는 뛰지 않겠다는 말을 해 카탈루냐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당시 5-0 승리는 마드리드 원정 사상 첫 승리로 디스테파노 이후 레알 마드리드쪽으로 넘어간 분위기를 다시 바르셀로나로 가져오는 의미있는 경기였다는 평입니다.
이후에도 두 팀의 자존심 싸움은 항상 치열했다.
바르셀로나의 주장까지 맡았던 루이스 피구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을 때는 돼지머리가 경기장으로 날아오기도 했으며, 2008년 마드리드가 우승을 확정 지은 당시 바르셀로나와 맞붙은 경기에서 바르셀로나 일부 선수가 (사무엘 에투, 데쿠) 라인업에서 빠져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100년을 이어온 두 팀의 악연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다행히 스페인이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이후, 대표팀에서 돈독한 관계를 쌓아온 두 팀이기에 감정 싸움까지는 번지지 않는 모양새다.
현재 두 팀의 상대 전적은 249경기에서 레알마드리가 100승 97패를 기록하며 근소하게 앞서있다.
다음 엘클라시코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는 16일 23시 30분 펼쳐지는 두 팀의 이번 시즌 첫 엘클라시코.
최근 레반도프스키 영입으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는 FC바르셀로나와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 승자가 어디가 될지 궁금해지는 매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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